YWAM pr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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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1 뉴코리아와 제사장나라 사명New Korea를 위한 21일 기도 2022.08.27 22:13
우리 역사는 고난의 역사이고 우리 민족은 한많은 민족이다. 우리나라는 5천 년 역사 중 약 1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았다. 5년에 한번 전쟁을 치른 셈이다. 고구려 이후 한 번도 국외에서 싸워본 적이 없고, 대부분 외국 군대가 우리나라에 쳐들어와 전쟁을 치렀다. 전쟁이 나 면 대부분 왕과 귀족들은 백성을 버려두고 도망가기 바빴다. 이 땅을 지킨 것은 힘없 는 백성들이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그의 저서 에서 우리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고 했다. 고려시대에 몽골이 쳐들어왔고 30만 6천 명이 포로로 잡혀가 원나라에 ‘고려풍’이 생길 정도였다. 임진왜란 때는 10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고 7천 5백 명만 귀환했다. 교토 시내 에 조선인의 귀를 베어 잘라놓은 무덤(耳塚)이 있다. 병자호 란 때는 5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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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0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보는 뉴코리아New Korea를 위한 21일 기도 2022.08.27 22:04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9) 뉴코리아는 하나님이 원래 지으신 코리아라는 민족과 나라가 구속되고 회복되어 새로운 나라가 되기 위해,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연합이 되어가는 모습을 일컫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뉴코리아는 현재 진행형이며, 뉴코리아의 영향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래 코리아를 만드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창조 모습을 갖고 열방을 축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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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9 북한의 인권New Korea를 위한 21일 기도 2022.08.27 21:54
국제 사회는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심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국제 사 회의 보편적인 개념으로 봤을 때 북 한은 인권 유린국이다. 심각한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 국제 사회는 인권개 선을 위한 노력을 다방면으로 지속하 고 있다. 그 노력 중 하나가 바로 유 엔인권위원회가 채택한 북한 인권결 의안이다. 2021년 11월 17일 유엔총회 산하 제3위원회는 북한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고 코로나19 대응 협력을 촉구하는 내용의 북한 인권결의안을 채택했고, 2021년 12월 16일에는 유엔총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이는 지난 2005년부터 17년 연속 채택된 것이다. 이런 국제사회의 우려와 노력에 대해 북한은 ‘우리식 사회주의’에 걸맞은 인권관으로 응수하고 있다. 북한의 인권 개념이 보편적인 인권 개념과 극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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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8 코리안 디아스포라 중국동포New Korea를 위한 21일 기도 2022.08.27 21:48
과거 한민족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 또는 ‘은자의 나라’라고 불리던 것 같이 구한말까지 내부지향적인 민족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부터 여러 국내외 사건으로 인해 한민족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게 됐고, 이로 인해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세계에서 유례없이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민족성을 가진 민족으로 변신하게 된다. 대한민국 외교부가 집계 한 자료에 의하면 2020년 기준 해외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코리안들은 180개 나라 7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어원적으로 헬라어 전치사 dia(넘어)와 동사 spero(뿌리다)의 합성어로 민족 분산 또는 민족 이산의 뜻으로 특정 같은 민족이, 자의든 타의든 자기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정착한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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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7 재일조선학교 역사New Korea를 위한 21일 기도 2022.08.27 21:39
재일동포역사의시작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강제노역과 유학, 생계를 위해 일본에 거주했던 조선인은 200만 명이 넘었다. 해방과 더불어 많은 수가 귀국했지만, 상당수는 일본에 남았다. 가지고 갈 수 있는 금액을 일본 정부가 1,000엔 이내로 제한 한 것이다. 그 당시 현금 1,000엔이라고 해봐야 쌀 한 가마 니도 못 사는 돈으로, 가난했던 대부분 조선인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사 람들에게는 어렵게 모은 재산을 포기해야 했고, 조선으로 돌아간다 해도 생활 터전을 마련할 수 없었기에 섣불리 떠날 수 없었다. 더욱이 그 당시 조선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했고 강제노역으로, 먹고 살기 위해 일본 전역으로 흩어진 이산가족들은 혈육을 찾기 전까지 떠날 수..